일상이야기/여행 이야기

서산 간월암, 해미읍성 그리고 해미순교성지

반쪽날개 2015. 5. 10. 00:00

 

어버이날을 맞아 부모님과 할머니를 모시고 충남 서산에 다녀왔습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선 이후 한참을 달려 첫번째 목적지인 간월암(看月庵)에 도착합니다.

 

 

 

 

 

물이 빠지면 육지, 물이 들어오면 섬이 되는, 두가지 모습을 가진 조그마한 섬 간월도.

그 섬 전체에 걸쳐 조그마한 암자 하나가 자리잡고 있는데, 그 암자의 이름은 간월암(看月庵)이라 합니다.

 

간월암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왕사였던 무학대사가 창건한 암자로,

무학이 이곳에서 달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해서 간월암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간월암 인근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물이 빠진 뒤였던지라, 걸어서 간월암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육지에서 간월암까지 배가 운행하지 않기 때문에, 물이 빠지지 않으면 갈 수 없다고 하네요.

대신 물이 빠지면 걸어서 2~3분이면 갈 수 있을 정도로 육지와 가깝습니다.

 

물빠진 모래밭을 걸어가는 도중, 바위에 쌓아놓은 수많은 돌멩이 탑을 볼 수 있었습니다.

위 사진은 그 중 하나구요.

 

 

 

 

 

간월암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다양한 표정의 장승들.

그리고 그 위에는 나무로 만든 오리 인형이 올려져 있습니다.

 

 

 

 

 

부처 형상이 새겨진 기둥과 그 기둥을 연결해놓은 줄이 난간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제 곧 초파일이라서인지 기둥은 물론 암자 여기저기서 연등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법당 앞마당에 설치된 기둥에 형형색색의 연등들이 매달려있는걸 보니, 이제 곧 초파일이라는게 실감되네요.

 

 

 

 

 

간월암에서 바라본 서해바다입니다.

 

 

 

 

 

암자라 하면 대부분 산속에 자리잡은 조그마한 사찰을 떠올리기 마련인데,

간월암은 섬에 자리잡은 것도 있고, 물때에 따라 섬이 되기도 하고 육지가 되기도 하는 절묘한 모습을 가진 암자입니다.

 

간월도 자체가 워낙에 작은데다 그 작은 섬 전체에 걸쳐 간월암이 자리잡고 있다보니,

섬에 자리잡은 암자라기보단 마치 바다위에 떠있는 암자와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구요.

 

 

워낙 조그만 규모의 암자다보니 사람이 몰리면 정말 복잡해진다고 하던데,

다행히 평일이라서인지 비교적 한산한 분위기 속에서 조그만 섬에 자리잡은 암자의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간월암을 한바퀴 돌아본 후 해미면 소재지에 위치한 해미읍성(海美邑城)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해미읍성은, 조선시대 성종 22년 (1491년)에 만들어진, 둘레 2,000m, 면적 19,4083㎡ 규모의 성곽으로,

고창읍성, 낙안읍성과 마찬가지로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읍성 중 하나이자, 현존하는 읍성 중 가장 온전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읍성이기도 합니다.

(사적 제116호)

 

태종 14년 (1414년)에 충청병마절도사영이 덕산에서 이곳으로 이설되고 효종 2년 (1651년)에 청주로 이설될 때까지
종2품 병마절도사가 주둔하는 군사방어 담당 병영성(兵營城) 이었고,

조선후기에는 천주교를 탄압하며 1천여명의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했던 순교성지이기도 합니다.

 

 

 

 

 

진남문을 통해 해미읍성에 들어선 후, 천주교 박해와 관련 깊은 옥사(감옥)를 지나 회화나무(호야나무) 근처까지 가면, 호서좌영 현판이 걸린 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이 문을 지나면 고을의 행정업무를 처리했던 동헌, 동헌 관리의 가족들이 거주했던 내아 (일종의 관사)로 갈 수 있습니다.

 

 

 

 

 

동헌 입구 오른편으로 멋스러운 나무들이 서있고, 저 뒤쪽으로 동문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동헌에서 바라본 동헌입구입니다.

 

 

 

 

 

동헌으로부터 동쪽에, 제법 큰 규모의 돌탑들이 늘어서있습니다.

여느 돌탑들이 그러하듯 이 돌탑도 소원을 비는 용도의 돌탑이고, 읍성 내 두곳에 자리잡고 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민가 근처에는 청보리가 바람에 하늘거리고 있었구요.

 

 

 

 

 

진남문에서부터 쭉 사진을 남기며 왔으면 좋았을텐데, 이날 행사가 있는지 행사 보러 온 사람들도 많고 체험학습 하러 온 학생들도 많았던 탓에,

사진을 찍어놓고 보면 사람들 뒷모습 밖에 안보이더랍니다...ㅜㅜ;;

 

하지만, 동헌이나 진남문쪽과 달리 동문쪽으로는 사람이 거의 없더라구요.

덕분에 한가로운 모습의 동문 일대 풍경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앞서 들렀던 해미읍성이 조선시대의 병영성임과 동시에 천주교 박해가 있었던 곳인 만큼, 해미읍성 인근에 순교성지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조선후기 해미 진영(해미읍성)의 진영장은 1790년대부터 약 100여년에 걸쳐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몰아 대거 처형하였습니다.
국가적으로 주도한 다섯번의 천주교 박해(1791년 신해박해,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때는 말할 것도 없고

평소에도 천주교를 심하게 탄압하였는데, 천주교 신자들을 고문하고 처형하는 과정이나 방법이 갈수록 잔인해지고 처형자 수도 계속 늘어나,

신자들을 처형하였던 해미읍성 서문 밖은 항상 천주학(서학) 죄인들의 시체로 산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처형해야 할 신도 수가 너무 많다보니 처형의 편의를 위해 많은 인원을 그대로 생매장 하기도 했는데,

그 장소가 바로 이곳 해미순교성지(海美殉敎聖地) 여숫골입니다.

 

 

중/고등학교 국사시간에 다 배우는 내용이긴 하지만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전파된 17세기 초 부터 조선 말기까지의 상황을 정리해보면,

17세기 초, 중국으로부터 서양문물이 전해져 들어왔고 이때 들어온 것이 세계지도와 마테오 리치가 지은 천주실의(天主實義)입니다.

 

유학자들은 서양문물과 함께 전래된 천주교를 종교생활의 대상이 아닌 학문적, 사상적 호기심의 대상으로서 흥미를 느꼈고, (서양의 학문이라 해서 서학(西學))
당시의 학자 중에서 서학에 영향을 받았던 사람으로 권철신, 정약용, 이벽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주로 남인 계열 학자들이 많음)
평등을 강조하는 천주교 사상은, 양반 중심의 사회체제에 불만을 품고, 전통적인 유교적 규범에서 벗어나기를 원한 당시의 사회 풍조와 잘 맞아 떨어져,
여러 사회 계층의 사람들 중 특히 하층민에게 있어 하나의 새로운 신앙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국가에서는, 가만히 놔두면 알아서 소멸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유교문화인 제사를 거부하는 등 국가 전복(왕권 약화)의 소지가 다분하고 신분질서를 문란케하는 서학이 급속도로 퍼져나가, 결국 본격적인 박해를 시작하게 되는데,

그 탄압이 앞서 이야기한, 신해박해,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병인박해 입니다.

 

최초의 천주교 박해인 신해박해는, 윤지충의 신주 소각사건이 그 원인으로,

비교적 천주교에 관대한 입장의 시파 (안동 김씨)가 집권하던 시기라 큰 탄압없이 끝났지만 갈수록 탄압의 정도가 심해졌습니다.

 

기해박해때는 5가구를 1개로 묶어 관리하는 오가작통법을 천주교를 감시하는데 이용하여 연대책임을 물게 하였고 (오가작통법 자체가 연대책임 성격이 있습니다),

병오박해때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가 순교,

사상 최대의 천주교 탄압인 병인박해(1866년, 고종 3년, 흥선대원군 집권기) 때는 프랑스 신부 9명과 더불어 수천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하였고,

탈출에 성공한 리델 신부가 중국 천진에 있는 프랑스 해군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이 사실을 알림으로써 병인양요가 발발하게 됩니다.

(그리고 병인양요 도중 직지심체요절, 왕오천축국전, 외규장각고문서를 비롯한 수많은 문화재를 약탈당하고, 천주교 탄압이 더욱 심해지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성당 입구입니다.

작년 (2014년) 8월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곳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정문 옆에 마련된 경사로를 따라 내려가면, 잘 가꿔놓은 정원과 마주하게 됩니다.

사제관(앞)과 수녀원(뒤) 사이에 높게 솟은 탑은 어떤 용도이려나요?

 

 

 

 

 

이번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시복받은 순교자를 위해 시복(諡福 / Beatification) 기념비가 세워졌습니다.

(시복은 로마 교황청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결정되는 만큼, 시복을 받는다는 것 자체만으로 상당한 영광이고 축복이라 합니다.)

 

시복 기념비 옆에는 순교기념 전시관이 자리잡고 있는데, 당시 순교한 천주교 신자들의 유품과 유해가 보관되어있고,

해미에서 발생했던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이야기와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 당시의 사진과 메시지도 볼 수 있습니다.

 

 

 

 

 

전시관 옆으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했던 장소인 진둠벙과 자리개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위 사진은 진둠벙으로, 손을 묶은 상태에서 이곳에 빠뜨려 죽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주변 정리도 하고 수심도 많이 얕아진듯 한데, 구덩이 깊이를 보니 예전에는 수심이 제법 깊었을 듯 합니다.

그리고 진둠벙이라는 이름을 볼 때, 바닥이 무른 늪 형식의 웅덩이(둠벙)지 않았나 싶네요.

 

 

 

 

 

소박한 분위기의 노천성당입니다.

 

다른 지역에 비해 유독 천주교 박해가 심했던 이곳에 이정도 규모의 노천성당이 자리잡기는 힘들었을테고,

아마 순교성지를 조성하면서 만든 성당이 아닐까 싶습니다.

 

 

 

 

 

야외제대(좌)와 순교탑(우), 그리고 순교탑 아래 위치한 무명순교자의 묘입니다.

이 정원 외곽에 십자가의 길이 적힌 14개의 비석이 세워져있구요.

 

이곳에서 해미는 물론 해미 진영 인근의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 처형하였고 그 수는 1천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주로 하층민들에게 널리 전파된 천주교의 특성상 처형당한 사람의 대부분은 하층민이었고,

처형자 중에는 관직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수는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관직에 몸담고 있거나 어느정도 신분이 있는 사람이 처형당했다면 문서 등을 통해 그 이름이 남아있겠지만, 하층민은 이름하나 남기지 못한 채 그대로 처형당했을겁니다.

무명순교자의 묘는 이런 사람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하구요.

 

 

 

 

 

진둠벙 옆에서 성당 쪽을 바라보면, 여숫골 표지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순교성지 답사를 마치고 나가기 전에 바라본 이름없는 집입니다.

이곳은 자유롭게 기도할 수 있는 순례공간이자 쉼터로, 이곳에서 성경 이어쓰기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합니다.

 

 

* * *

 

 

점심무렵 도착해, 간월암, 해미읍성, 해미순교성지를 둘러보고 나니 시간이 꽤 흘러 저녁무렵이 되었습니다.

시간적인 여유만 많았더라면 차분하게 여기저기 둘러봤을텐데, 그러지 못함이 아쉽네요...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그때는 이번에 둘러보지 못했던 곳 까지 구석구석 살펴보고 싶습니다.

 

평일이라 그런지 고속도로도 나름 한가해서 정체로 인한 피로는 없었지만, 오랜만에 장거리 운전한데다 하루종일 돌아다닌 탓에 되게 피곤하더라구요.

그래도 멋진 경치도 구경하고, 우리나라 역사의 일부를 몸소 확인하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혹시 아직 가보지 않으신 분들 계시다면 날씨 좋을 때 한번 다녀와보심은 어떠실런지요.

 

 

주절주절 쓰다보니 글이 많이 길어졌네요.

슬슬 마무리 하겠습니다.

 

부족한 글, 사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